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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július 29., szerda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앵거스 프레이저 / Angus Fraser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앵거스 프레이저
제1장 방랑의 기원
로마니어의 기원이 인도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처음 인식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년 전쯤이다. 로마니어와 여러 가지 인도어의 어휘가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집시들이 자신의 종족 남성들을 가리켜 널리 사용하는 명칭을 통해 그들의 조상이라 여겨질 법한 하나의 민족을 유추할 수 있다. 유럽계 로마니어 롬(rom), 미국계 로마니어 롬(lom), 시리아와 페르시아계 로마니어 돔(dom)이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특정 부족 집단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돔바(domba) 및 현대 인도어 돔(dom) 또는 둠(dum)과 음운 상 정확히 대응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이 단어는 ‘노래와 음악으로 생계를 삼는 하층 카스트 남성’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주의 이유는 기근이나 전쟁을 들 수 있지만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1000년도 전에 인도 아대륙을 떠나온 사람들의 카스트와 직업, 민족적 기원은 무엇인지, 또 그들이 단일 집단으로 떠났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제2장 초기의 이동
▶페르시아의 집시 선조
페르시아의 역사(전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군주 바람 구르가 음악도 없이 술을 마시는 가난한 계급을 위해서 인도의 왕 샹굴에게 악사와 광대(루리)를 청했다. 그러나 루리는 페르시아에 온 지 1년 만에 왕이 내린 소와 밀을 다 써버렸고 이에 왕은 돌아다니며 생계를 꾸리고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과 함께 그들을 추방했다. 10c 이전 페르시아에 이러한 종류의 인도 방랑민이 실제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집시의 대탈출을 바람 구르의 시대(5세기)와 연결 짓는 것은 곤란하다.
로마니어에 아라비아 단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럽 집시들의 선조는 아랍의 첫 번째 침략 이전에 페르시아를 통과했을 것이다.(7C 중반 이전) 그러나 아랍 세력이 페르시아를 석권하자마자 즉시 로마니어에까지 급격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언어의 변천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며, 유럽계 로마니어에 아라비아어 차용어가 몇 가지 있다는 점에서 난점이 생긴다.
▶아르메니아에서 얻은 차용어
아르메니아는 펜계(유럽계 로마니어와 로마브렌어)집시가 페르시아를 떠나 도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로마니어의 유럽계 방언에는 아르메니아에서 나온 차용어가 많다. 즉 아르메니아에서 이들의 체류기간이 짧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르메니아로부터의 탈출이 일어난 원인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집시들의 비잔틴 제국으로의 진출은 애당초 비잔틴 제국과 아랍 사이의 오랜 항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면서 완만하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기 집시의 사회 구조
첫째, 집시의 사회적 존재는 인도의 모델을 반영하고 있다. 인도의 사회적 존재가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은 민족적 하위 카스트, 즉 자티(태생 또는 혈통)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하위 카스트의 상호관계는 직종 전문화에 기초하고 있다. 자티의 직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해당 기능에 대한 충분한 수요를 찾아서 지리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분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집시들과 특히 인도 아대륙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유랑 집단들의 유사성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둘째, 그들 가운데 정착하지 않는 자들은 수많은 유랑 집단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고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집시와 일반 유목민의 본질적인 차이는 집시의 경우, 제품을 팔거나 무언가 거래를 하고 서비스를 팔기 위해 이동하는 반면 일반 유목민들은 목축과 농업 때문에 계절적으로 이동한다는 데 있다.
제3장 비잔틴제국과 발칸반도를 향해
▶비잔티움과 그리스
셀주크 투르크인의 아르메니아 침공(11세기)으로 집시들이 비잔틴령 서부(콘스탄티노플,트라키아)로 밀려나게 되었다. 집시들은 비잔틴 제국과 그리스에서 단어를 획득했다. 유럽계 로마니어 어휘에 대한 그리스어의 공헌이 다른 어떤 언어보다 더 중요하게 남아있다. 또한 이들은 기독교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서 온 여행자들과 만났고 성지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또한 순례자들이 특권을 가진 여행자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지식은 이들이 서구 기독교 세계로 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때 취하게 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14세기 말 무렵 집시들은 발칸 반도 여러 지역에 광범위하게 정착해 있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는 집시들이 가치 있는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노예상태로 있었다.
제4장 순례자로 위장하다
1417년은 집시 역사상 극적인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이들은 순례자 집단으로 나타나 원조를 요구하고 획득했다. 당시 집시의 출현은 엄청난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보호영장
집시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며, 이집트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사라센인들에게 정복당한 뒤 신앙을 버렸다가 그 후 로마 황제와 여타 기독교 왕들에게 재정복 당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교황을 만나러 로마로 떠났고, 교황을 만나 죄를 참회했다. 교황은 7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며 잠은 절대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는 고행을 부과했고 그들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주교장을 지닌 모든 주교와 수도원장은 그들에게 금화로 한번에 10파운드씩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바티칸 공문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고문서 상당부분이 유실된 상태였으므로 ‘없다’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들이 위조를 감행했을 가능성도 크다. 중세 시대에는 위조문서 작성이 횡행했고 그와 관련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동에 대한 평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시가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처음 방문한 나라에서 그들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없다. 또한 수송 및 숙박 수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없다.
집시들의 서방 이주를 촉진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투르크의 지배로 인한 끊임없는 전란의 장에서 집시들이 빠져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또는 투르크 황제에게 봉사하지 않으려는 공작과 백작 일부의 이해관계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시 그 지역으로부터의 피난민은 집시들만이 아니었다. 투르크인의 유럽 진출 후 다수의 성직자 및 가신들과 함께 안전한 장소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서방을 떠돌면서 자선으로 연명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것이 집시들의 서방 이주와 순례자로서의 겉치레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5장. 새로운 흐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집시에 대한 태도가 처음으로 냉각되기 시작한 곳이다. 집시에게 주어지는 대접은 들쭉날쭉했는데 여전히 지속적인 대접을 받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도시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당하고 도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497년 신성 로마제국 의회는 집시를 스파이라고 비난하고 그들을 제거할 방법을 검토하기로 결의했으며 1498년에는 집시에 대한 추방 조례가 제정되었다.
-스위스
1471년 뤼세른의 타크사충 의회는 스위스 연방 내에 집시들의 주거나 보호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프랑스
집시들은 처음에는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당히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도둑질을 비롯한 기타 악행에 대한 불평이 생겨났고, 론강 일대에서는 집시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1504년 국왕 루이 12세는 공문서를 통해 이집트인 방랑자들을 색출하고 어떠한 안전통행증을 제시하더라도 그냥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외에 여러 가지 집시에 대한 포고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집시들이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숨지 않았고 교묘한 방법으로 패스포트와 안전통행증을 손에 넣었다. 수없이 써먹어온 꾸며낸 이야기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토마스 백작에게 부여한 것과 같은 호의적인 대우가 그 후로도 수십 년 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470년대 이래로 집시들은 돈을 받고 쫓겨나거나 그냥 쫓겨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저지대 지방
부르고뉴 공국은 1419년부터 1467년까지 필립 왕 재임 기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의 하나였다. 이 때문에 집시들에게는 저지대 지방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1440년대가 되자 집시들에 대한 명백한 반감의 징후가 드러났다. 1442년 집시들에게 관대했던 공화도시 투르네는 구호품과 숙박을 기대했던 집시 일행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저지대 지방이 1504년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고 샤를르 5세가 즉위하면서 통치의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집시문제와 관련해서 관용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지시가 전국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집행되지는 못하였다. 오버아이셀 지방 샤를르 5세 치하에서는 집시의 입시와 체재를 부정할 뿐 아니라 그들과 합류하는 자들에게도 금지령을 확대하는 포고가 네덜란드 북부 여러 지방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그 실제 효과는 미미했다.
▶이탈리아
15세기에는 집시들에 대해 우호적 태도가 나타나지만 15세기 말이 되면 이탈리아 각 지역에서 집시를 추방하는 포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1493년 루도비코일 모르의 통치하에서 발행된 두 개의 칙령은 이탈리아의 집시 정책이 철저한 억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두 번째 칙령은 공국 내 모든 집시들에게 즉각 떠날 것을 명령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숫자도 너무 늘어난데다가 도벽이 있다는 것이었다. 1506년에 내려진 두 개의 포고는 페스트를 전염시키는 매개자로서 다른 걸인들과 함께 집시들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영내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에서 보여준 집시들에 대한 처우는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방식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부는 일종의 노예 상태에 처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금속 세공과 무기 제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탓에 국왕의 노예로 공포되었다.
특별히 헝가리의 집시는 악사로서도 평판을 얻었다.
1526년 라요스 2세가 모하치에서 패배한 후 헝가리 대부분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집시들은 오스만의 지배에 선뜻 순응했으며 상당수의 대장장이들은 투르크군을 위해 봉사했다. 그 밖에 악사, 이발사, 메신저, 또는 사형 집행인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보헤미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내려진 추방령은 1538년 모라비아에서 발행된 것이다. 보헤미아는 1541년과 49년 집시의 소행으로 알려진 프라하 화재 사건 이후 마찬가지의 조치를 취했으며, 폴란드의 국회는 1557년 일련의 억압법 제1호를 제정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집시들에 대한 스코틀랜드 최초의 기록은 1505년 스코틀랜드 재무상의 장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시들이 모종의 여흥을 제공한 대가로 돈을 지불한 기록이다. 제임스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과 집시의 관계는 양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에서 집시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으로 보이는 기록은 헨리 8세의 통치 기간 중에 쓰인 『기사 토마스 모어 경의 대화A』에 나온다.
집시의 수는 1520년대에 대폭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이후로 잉글랜드 최초의 억압책이 등장한다.
▶스칸디나비아
집시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거쳐 처음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을 겸하고 있던 크리스티안 3세는 1536년과 1554년, 모든 집시들에게 석 달 안에 그 나라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1세는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조치를 취했지만 1540년대가 되자 집시를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그가 죽은 1560년 이후에도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같은 해 성직자가 집시와 접촉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법령이 승인되었다.
▶이미지와 고정관념
-집시들의 외관
집시들의 검은 피부는 그들을 추해보이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긴 머리카락과 귀고리, 기이한 옷차림은 눈에 거슬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여성들의 확실한 집시풍 의상은 이국적인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당시 그려진 회화, 연극 등에서 집시는 도둑질, 빈집털이, 소매치기, 말 훔치기, 주문걸기, 마술, 사기 등과 결합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독특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
▶유럽의 대응
집시들이 어느 나라에 도착한 후 10-20년이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도시민들이 자선에 지치게 되고 저항과 거절의 조짐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칙령은 보통 집시가 그 나라에 도착한지 수십 년 내지 1세기 사이에 제정된다. 이것이 집시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경향이다.
유럽에서 나타난 종교적 분위기의 변화는 집시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중반 무렵 유럽 인구의 거의 40퍼센트가 개혁 신앙을 신봉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교황의 교서는 그 효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순례에 대한 열정과 순례자의 지위가 눈에 띄게 저하되면서 7년간의 순례라는 집시의 이야기는 그 효력이 약해졌다. 구걸 또한 개혁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근절시켜야 할 중요한 악습으로 꼽히고 있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신앙심과 농노제, 극심한 노동의 생활을 강제 받고 있던 유럽 사회에서 집시들은 지배적인 도덕의 기초가 되는 본질적인 가치와 전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존재로서 정주민들의 잠재적인 편견을 자극했다.
제6장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 까지 200년 이상 집시들은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이단의 행위와 마술에 대한 종교적 적의와 인종적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이단이었으며, 기존 질서와 마찰을 일으켰고 강제와 억압에 의해 정상화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추방, 동화, 멸절
각국에서 제정된 반집시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 원인으로는 일부 주민들이 보인 침묵의 저항이나 하급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당시 경찰조직의 결함 등이 있다. 불행히도 그 결과 더 많은 법률이 만들어졌고 형벌은 더욱 가혹해졌다.
▶유형(流刑)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추방이나 강제 정주화 정책을 시도했고, 이는 집시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
새로운 추방 수단으로서 해외식민지로의 유형을 행한 최초의 국가이다. 쥬앙 3세 때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집시가 처음으로 유형 당했다.
-스페인
17세기 중반 이후로 집시와 그 밖의 부랑자를 쿠에타에서 오란에 이르는 북아프리카의 군과 요새로 보냈다.
-프랑스
집시에 대한 조직적인 유형을 시행하지는 않았으나 상당수의 집시들이 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로 넘어갔다.
-잉글랜드
1579년 제정된 부랑자법을 근거로(‘도무지 손볼 도리가 없거나 위험한 자들은 해외로 추방되어야 한다’) 집시들을 아메리카 식민지로 유형 보냈다. 식민지에서의 강제 노역은 영국의 강제 노역보다 더 가혹했으며 이러한 상태는 흑인 노예가 죄수 노동력의 경제적 중요성을 박탈하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스코틀랜드
크롬웰의 호민관 시대에 내려진 1655년 포고에 의해 방랑자가 ‘서인도 제도를 비롯한 다른 곳’으로 유형에 처해졌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제국에는 집시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직면했던 것과 같은 체계적인 억압의 법령이 없었다. 이 제국은 종속국 주민 집단의 관습과 제도를 존중했고, 자체 지도자의 협력을 받아 각각의 집단을 통치했다. 집시 중에 노예 상태로 있던 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인으로서 오스만제국의 비투르크인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대부분 인정받고 있었다. 방랑 습관을 없애기 위한 산발적인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상당 부분 인정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사회 내에서 집시는 빗자루 제작사, 굴뚝 청소부, 악사, 춤꾼, 곰 부리는 사람, 대장장이 등의 역할을 했으며 무기 수선공 및 악사로서 병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가기도 했다.
▶종의 생존
집시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이 가까이 가기 어려운 황무지나 삼림으로 들어가거나, 국경 지역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지대와 독일의 여러 공국들의 경계 지역, 로렌과 제국의 국경, 스코틀랜드 경계선,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쪽 등에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또한 많은 집시들이 악사 또는 전투원으로서 자의든 타의든 군에 입대했는데 군은 실제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집시가 관용을 얻거나 감옥으로부터 석방되고 운이 좋으면 우대 조치까지 기대할 수 있는 하나의 도피처였다.
집시의 이동 범위는 차츰 협소해지고 있었고 바야흐로 특정 지역으로 한정되고 있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집시 인구의 상당수가 정착했다. 정주화가 반드시 동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동생활을 계속하는 집시조차도 주요 활동지가 되는 나라의 사회적 영향으로 인해 그 나라의 국민적 특징을 습득하고 있었다.
▶희미한 빛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당국(그리스정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은 집시의 영혼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도 활동은 드물었고 집시를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무심한 시도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집시들은 종교의 문제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개 세례와 견진 성사도 받았고, 교회에서 결혼식도 올렸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대개 집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에서 그런 방랑자의 ‘악랄한 계략’에 대해 경고하고, 그에 대한 억압을 승인했다. 네덜란드의 칼뱅파 신학자 보에티우스는 집시 아이들에 대한 세례에 반대를 주창했다.
집시들을 이해하려는 세속 세계의 움직임은 매우 느리게, 그러나 교회보다는 조금 빠르게 진행되었다. 16세기 후반 언어학 분야에서 약간의 전진이 나타났다. 집시를 테마로 한 최초의 학술논문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논문들은 집시에 대한 이전 세대의 편견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7장 변화의 동력
▶새로운 인식
집시의 생활양식을 최초로 포괄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헝가리 학자이다. 그것은 1775년과 1776년에 걸쳐 헝가리의 독일어 신문 「비나 안자이겐」에 익명의 기자 명의로 실린 40회 이상의 연재 기사에서 나타났다. 헝가리의 루터파 목사가 저자였다. 그는 ‘집시를 인간으로 기독교도로 전환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유익한 신민으로서 국가 내부에 묶어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인내와 노력이 요구 된다고 경고했다.
하인리히 그렐만은 1783년 출판된 그의 저서 『집시』에서 집시 인구를 70만 명에서 80만 명 사이로 보았고 특히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발칸반도 전역에 많다고 했다. 그는 집시 여성들의 거리낌 없는 타락과 식인 풍습에 대한 비난 등과 같은 중상 모략형의 다양한 이야기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이후에 집시의 식인 풍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흘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렐만의 연구는 언어학적 증거를 활용해서 집시어의 인도기원설 일반을 광범위하게 인식시키고 그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대중의 눈앞에 부활시킨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 역시 집시 추방정책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집시는 교육을 통해 갱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의 부흥으로 민화와 가요, 관습과 미신의 보고인 집시들에 대한 흥미가 증가했다.
역사분야에서는 프랑스의 서지학자 폴 바타이야르가 1843년부터 수십 년에 걸쳐 발표한 일련의 논문에 의해 유럽 집시의 초기 역사가 그 결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언어학은 로마니어 연구를 급진전시켰다. 집시어는 여러 가지 힘에 굴복하며 다양한 단계를 거쳐 쇠퇴해가는 언어의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었다.
교회 가운데서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적극적으로 집시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도덕적 설복을 통해 미개한 집시들을 설복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게 정착하라고 설득하고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나게 하며 종속과 복종의 가치관에 의거한 직업을 갖게 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 존 베어드는 1830년 커크 예솔름에 거주하는 집시 집단에 들어가 생활 개선 사업에 착수했다. 또한 잉글랜드 메서디스트파 설교사 제임스 크랩이 그가 지도한 사우샘프턴 위원회와 함께 집시들을 위한 사업을 진행시켰다. 영구적인 ‘교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 사업의 실제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훌륭한 일을 하는 집시 출신 전도사가 몇 명 등장하기도 했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
집시들은 유럽에 출현한 초창기부터 악기 연주자나 가수, 또는 무용수로서 음악과 결합된 모습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집시에게 공통된 음악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음악적 방식도 없다. 그들은 창조자라기보다는 계승자 겸 편곡자로서 주변 사회의 특징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헝가리, 러시아, 스페인에서 직업적 음악가로서 탁월한 지위에 올라 거의 국민적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구성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헝가리 집시들은 헝가리 음악의 전통을 교묘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헝가리에서는 금속 세공보다 음악 연주가 집시 최고의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야노스 비하리(1764~1827년)는 최초로 이름을 알린 음악가로써 그와 그 후계자들은 베르분코스 스타일로 알려진 음악 양식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헝가리 민족음악의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몇 부 합창으로 이루어지는 즉흥연주를 하는 집시 합창단이 유행했다. 19세기에 집시음악은 러시아 음악 문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5세기 말 이후 집시들이 스페인의 노래와 춤을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연주했고 그 과정에서 집시풍의 매력을 부가시켰다. 이들의 춤은 세속은 물론 종교적인 의식의 인기 행사가 되었다.
▶농촌과 도시의 풍경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세기 동안 집시가 사는 세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전역은 산업적, 사회적 변화를 겪었고 농촌 생활이 광범위하게 후퇴했다. 도시화와 산업화, 그 밖의 다양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집시들은 지배체제가 만들어낸 기회를 활용하여 자립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임금노동자로 이행하라는 유혹에 저항하며 대부분이 공동체의 어떤 이상과 독립성, 그리고 자영업 등을 집요하게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시들의 노동 관행은 점차 변화했다. 행상을 위한 물건 제조는 점차 줄었고 판매하는 물건도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도매업자로부터 사게 되었다. 땜장이와 수선공을 원하는 수요 또한 줄었고 수확 작업 역시 기계화되었다. 고객들이 지리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에 따라 집시들의 이동 거리 역시 짧아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시들의 자유나 민족적 특성, 또는 직업과 주거의 유연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속박을 넘어서
19세기 초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집시는 총 20만 명에 달했으며 사적으로 소유된 노예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수는 대략 3만 5000가족에 달했다. 왈라키아의 알렉산더 기카는 1837년에 ‘공공 집시’ 4000가족을 해방시켜 마을에 정착시킨 뒤 특권 귀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농사일을 주도록 했다. 기카의 후계자 게오르규 비베스큐는 1847년 왈라키아의 교회 소속 노예까지 해방시켰다.
몰다비아의 대공 그리고레 기카는 1855년에 노예 제도의 폐지를 결정했다. 크림 전쟁이 끝난 뒤 양 공국이 통합되어 루마니아로 바뀌면서 제정된 신헌법에 따라 법적으로 완전한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원칙적으로는 루마니아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사회적 지위가 만들어낸 적대감과 편견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동
집시 구성원의 일부가 발칸 반도와 헝가리로부터 사방으로 이동을 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다양한 집시 부족들이 세계 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칸 반도와 헝가리로부터 이동한 집시들의 로마니어 방언에는 루마니어의 영향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오랜 기간 루마니아권에 뿌리박고 있었고 스스로를 ‘롬’이라고 불렀다. 유럽 상당수의 나라에서 롬은 집시 주민들의 새로운 계층으로 정착했고, 대서양을 건넌 자들은 집시 주민들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았다.
▶보존과 변화
집시의 문화적 전승 가운데 어느 정도가 그들에게 고유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민간전승 분야의 경우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접촉한 비 집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에 순응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노래와 이야기에 통합시켰다. 보편화 되었지만 유럽의 민간전승에도 존재하는 비슷한 관습들을 제거하고 나면 지극히 집시적인 동시에 그들이 유럽에 오기 전부터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는 죽은 자의 육체를 이탈한 영혼이 달라붙거나 배회하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이러한 의식의 세부 사항들은 극히 다양화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나라의 집시 집단이 지키는 관행 하나는 고인(故人)의 유품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오염에 대한 공포와 거기에서 생기는 일련의 터부이다. 그들의 오염 개념은 오늘날 집시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파악될 수 있다. 민족적 경계선을 표현, 강화하고 집시와 가제(로마니어 방언으로, 집시가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다.)사이의 근본적인 경계선을 그어주기 때문이다. 이 규범을 지키는 자들은 가제와의 강하고 친밀한 만남을 멀리하게 된다. 이 규범은 그들의 역사에서 가제와 접촉해야 하는 형태의 고용을 피하는 경향을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제8장 지옥으로 가는 길
새로운 이동은 집시에 대한 서유럽 각국 정부의 태도를 경화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잠자고 있던 옛날의 대응책들을 소생시키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은 생물학적 결정론 및 인종과 혈통의 순수성에 관한 망상이 번성한 시대였다. 프랑스의 고비노 백작의 에세이『인종의 불평등에 대하여』는 유럽, 특히 독일의 철학과 정치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주장의 핵심은 인종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결정 요인이라는 데 있었다. 고비노는 잡종의 열등성을 확신했고, 잡혼은 예외 없이 파멸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범죄의 격세유전적 기원을 강조한『범죄자』(1876년)를 쓴 체사레 롬브로소는 집시에 대해 장점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고 집시는 자만심이 강하고, 파렴치 하며,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정하고,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방종하고, 죽은 고기를 즐겨 먹을 뿐 아니라 식인 풍습마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집시의 해악과 싸우기’
-독일
19세기 중반부터 외국인 방랑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행상을 대상으로 한 면허 제도가 강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세기에 특별히 집시에 대해 내려진 최초의 조치는 1885년의 포고였다. 그것은 국경에서든 영내에서든 그들의 증명 서류를 엄밀히 검사하고, 가능한 한 노동 허가서를 취소하며, 말의 전염병에 대해 엄밀히 검사하는 것 등을 명문화하고 있었다. 1899년에는 집시의 출현 정보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취해진 조치를 취합하는 정보기관이 뮌헨에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1929년 그 관리를 독일 전역으로 확대하고 독일 형사경찰위원회에 의해 ‘집시의 해악과 싸우는 중앙 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스위스
스위스 법무성은 뮌헨 모델을 기초로 전국등록제도를 제정했다. 스위스의 아동복지단체인 프로 유벤투테 재단은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과 진화론에 근거해서 이동생활자의 아이들을 사회 본류에 합류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어디에든 정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집시 아이들을 부모의 동의도 없이 데려와 이름을 바꾸고 양부모의 집으로 보내는 제도를 시작했다.
-프랑스
1895년 국내의 모든 ‘유동민, 집시, 방랑자’에 대한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1912년 국적을 불문한 모든 집시에게 ‘신체 특징 수첩’의 휴대를 의무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휴대하지 않은 상태로 외출하고 배회했을 경우 재판소에 소환되기 십상이었다.
-영국
도시화의 진행으로 그들의 존재가 더욱 눈에 거슬리게 되고 노역 또한 불필요해지면서 그들의 지위는 더욱 약해졌다. 집시들은 법률적으로 특별히 지명되지는 않았지만 행상인, 부랑자, 공중위생, 공유권, 엔클로저 등을 취급하는 다양한 일반 법률의 적용을 받았다.
▶잊혀진 홀로코스트
국가 사회주의당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절멸 대상으로 지정된 것은 사실상 유대인과 집시라는 두 민족 집단이었다. ‘찌고이네르’라는 규정의 대상을 명확히 하기 위한 지침이 필요했다. 완전한 시민권 적격자 판정의 골격을 세우기 위해 1935년에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고, 특히 그 해설서가 집시를 유대인과 함께 위험한 ‘프람드라세(외래인종)’으로 지정했다. 집시의 ‘인종·생물학적 평가’의 기준은 1941년 히믈러가 포고한 3세대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류법으로 더욱 정교해졌다. 1937년 무렵부터 ‘반사회적 분자’, 특히 집시에 대한 압력이 급속하고 무자비하게 강화되었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 주요 교정책으로 이용되었다.
전쟁 중 유럽에서 죽은 집시 희생자의 수는 25만 명에서 50만 명, 또는 그 이상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전후 배상문제에서 살아남은 집시 희생자들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제9장 현대의 실상
▶국경을 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결과, 살아남은 집시들은 유럽 각지에 대량으로 재배치되었다. 그것은 주로 전쟁 중에 강행된 대규모 추방의 결과였지만 부분적으로는 보다 안전한 환경을 찾아 그들 자신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도망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천 명의 집시들이 슬로바키아 농촌의 고립된 정착지를 떠나 상당수가 공업지대로 보내져 주로 공장과 건설 현장의 미숙련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소련에 편입되었던 옛 폴란드 영토에서 돌아오는 난민의 물결이 있었다. 그 중에는 대규모 롬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초기에 우랄 산맥 반대편으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1956년 헝가리 반란 이후 서쪽으로 도망친 15만 명의 난민 중에도 집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대 포르투갈의 정치 불안으로 스페인으로 집시가 유입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서쪽을 향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 이동했다. 이 이동에는 정주 집시와 유동 집시가 모두 참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출신 부족이나 사용하는 방언 역시 다양했다. 상당수는 일정 기간마다 그동안 모은 돈과 고향에서 찾는 물건들을 싣고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일부는 고물상으로 전환했다. 구걸과 점치기가 다양한 수입원을 보충해 주었다.
이러한 이동은 집시 사회 조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조건은 대가족 내부의 유대를 일부 손상시켰고 그에 따라 핵가족이 더욱 중시되었다. 집단을 이끄는 짜임새도 불안정해졌다.
▶정책의 문제점
2차 세계대전 이후 집시들의 생활권은 한 국가 내부로 한정되었고 그에 따라 각국 정부의 국내 전략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유럽 집시 인구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1925년에 집시가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았으며 1926년에는 러시아 집시 동맹이 결성되었다. 로마니어를 교육 매체로 사용하는 초등학교도 다수 개설되었으며 로마니어로 된 책과 정기간행물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러한 초기의 정책은 부활되지 못했고 1956년에는 유동생활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폴란드는 1950년대 초반 이래로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동 집시에게 주택과 직업을 주는 것으로 통합을 추진하려 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러나 집시들에게 제공된 일은 미숙련에다 임금이 낮고 육체적인 노동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유동민들은 이동을 계속 했고 정부는 1964년에 강제 조치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정주 집시들이 늘어났지만 1980년대가 되자 새로운 주민과 지역 주민 사이에 분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수백 명의 집시들이 시민권도 없는 상태로 폴란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헝가리에서는 1958년 집시 협의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1960년에 폐지되었다가 1974년에 재건되었으며 1986년에는 보다 대표적 성격이 강한 로마니 회의로 대체 되었고 계속해서 200여개 정도의 지방 문화 클럽을 결합한 전국 집시 협회로 확대되었다.
루마니아는 헝가리인과 독일인 소수민족에게는 최초로 인정했던 교육과 문화적 차원의 지원을 집시에게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정부는 강제적 정주 정책을 추진했고, 뒤이어 대집단의 분산을 기도했으며 1970년대 초반부터는 집시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불가리아에서는 1958년 포고에서 집시의 이동을 금지하고 그들을 공장과 협동조합 농장으로 끌어 들이라고 시의회에 명령했다. 1970년대부터는 집시의 존재를 법률적으로 말살시키려 했다. 신분증명서에서 ‘집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무슬림 이름을 가진 자는 새로운 슬라브풍 이름으로 개명해야 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시는 1981년 알바니아인, 헝가리인, 투르크인 등의 소수민족과 마찬가지 조건으로 헌법상의 ‘민족’지위를 인정받았다. 보다 광역적 차원의 사회·문화적 조직들이 수십 개 결성되었고,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집시도 나타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유동 집시에게 정주를 강요하지 않은 유일한 공산국가였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집시들은 공업화의 진전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정주 집시가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는 동유럽에 비해 정주 집시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가 정책적으로 고려한 것은 야영 장소와 교육의 문제였다.
영국에서는 최초로 지방 당국에 대해 특별 야영 장소의 설치를 호소한 회보가 1962년 발행되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에는 1968년 ‘이동주택 설치장소 규제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정부는 이동생활자들에게 야영 장소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관내에 거주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지방 교육 당국에 있었다. 이동생활자의 아이들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대 이래로 집시들의 교육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정책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야영지 설치에 관한 재정적 지원과 지방의회의 야영지 설치 의무 양자를 폐지하고 그와 동시에 불법 야영지에 관해 새롭게 엄한 권한을 도입하자는 제안이 등장했고 그를 위한 조치가 1년 후에 ‘형사 재판·공공 질서법’이라는 법률에 포함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49년 이동생활을 하는 집시의 비참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특별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20년 후 이동생활자의 신체 특징 수첩, 매달 경찰에게 검사받아야 했던 이동수첩이 폐지되었다. 1980년 대 말까지 다양한 수준의 야영지가 배치되었고, 민간 조직 차원에서 다양한 학급과 학교가 시도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학습 상 곤란이 있는 집시 아이들에게 보조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가 표명되었다.
벨기에에서는 야영지 제공이 중앙 정부의 재정 지원 하에 대체로 각 지방의회의 판단에 맡겨졌다.
스웨덴에서는 폴란드에서 추방된 수백 명의 집시를 받아들여 그들을 난민으로 대우하면서 집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상당수의 외국인 집시에게 주택을 제공했고, 이동주택거주자를 대집단으로 모아 비교적 소수의 집주지에 살게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대규모 야영시설의 폐해가 점점 분명해 지면서 정부 정책의 전환 일어났다.
국제무대에서도 집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UN 인권위원회는 1977년부터 집시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유럽 공동체의 여러 기관은 1984년부터 주로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가 1990년에 채택한 소수민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문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문서에는 민족을 이유로 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단죄한 뒤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각국은 집시 고유의 문제를 인식 한다.’
동구 전체주의의 붕괴 이후 인종 차별이 동기가 된 학대와 노골적인 폭행이 일어났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집이 불타고 집시 가족이 몰매를 맞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붕괴 후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인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집시가 있는 곳에서는 집시가 대신 단죄 당했다.
▶인구와 분류
오늘날 집시의 인구 구성은 다양한 요소의 혼합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본적인 구분은 오래 전부터 정착 하고 있던 집시집단과 과거 1세기 전후에 도착한 자를 구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분법으로는 진티와 로마가 있다. 진티는 독일어권에 오래 거주한 집시로서 로마니 방언에 독일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로마는 동유럽 출신의 집시 일반을 가리킨다.
발칸 집시의 계보는 방언과 종교(무슬림과 기독교), 직업상의 특화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는 20종류 정도의 주요 부족이 확인되었다. 각각의 부족은 고유의 지리적 영역을 가지고 있고 독자적인 하위문화가 있다. 자신들만의 직업에 종사하며, 독특한 방언을 쓰고 결혼도 집단 내부에서 한다. 불가리아에서는 북동부에서만 19개의 부족이 구별되었다.
이후 정주화 및 문화적 동화가 강제되고 정부가 집시를 정당한 민족 집단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집시의 국민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부족 구분은 서서히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서유럽의 집시는 생활양식 측면에서 집시와 공통점이 많고 문화적 요소 또한 상당수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이동생활자 주변 집단이 많다는 점에서 분류가 어렵다.
아일랜드의 유동민 ‘틴커(땜장이)’는 집시가 도착하기 전부터 존재했다. 집시와 교혼을 포함한 상당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의 이동생활자 다수는 집시의 터부를 일부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언어인 ‘캔트어’에는 로마니어 단어가 매우 일반적이다.
노르웨이의 ‘옴스트라이페레(방랑자)’는 지역 주민과 혼혈인 집시, 독일인 교혼이 기원으로 보인다. ‘로디어’라고 불리는 그들 고유의 언어는 어휘의 3분의 1가량이 로마니어에서 왔다.
스웨덴의 이동생활자 ‘레잔데’의 어휘에 역시 다수의 로마니어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혼돈 가능성, 엄밀하고 신속한 인종구분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집시 인구수를 계산하는 것은 대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변화
집시를 구분하는 데는 언어의 차이가 중요한 판정기준이 된다. 로마니어는 역동적이다. 유년기 이후에 로마니어를 쓰는 사람은 모두 2개 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유럽 전역에서 주류 문화로부터의 끊임없는 차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자화된 규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로마니어의 분화가 제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로마니어는 20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60종류 이상의 방언으로 이루어진 언어군이 되었다.
-블라크계 로마니어와 비블라크계 로마니어
블라크계 로마니어: 모두 루마니아어의 영향을 강하고 보여준다. 이들 방언은 전체 어휘의 약 5분의 2정도가 루마니아어를 공유하고 있고, 루마니아어의 몇 가지 언어습관과 구조를 인계받았다.
비블라크계 로마니어: 언어 간에 긴밀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와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 우크라이나 등에서 영국과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다. 접촉한 언어의 여러 요소가 로마니어에 깊이 침투한 결과, 로마니어 사용자 다수는 다른 지역의 동족과 소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변화의 전통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 심화, 정주화, 가제 옆에서의 생활, 자동차에 의한 이동, 산업화, 생계를 벌 수 있는 기회의 변동 등 주변 사회화의 관계가 변천하면서 나타난 변화로 종종 집시 사회의 소멸 가능성이 점쳐지곤 했다. 그러나 정주화 그 자체는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고 ‘집시적’인 방식으로 생계비를 버는 것을 포기시키지도 못했다. 오늘 날 동서 유럽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정주 집시들은 수십 년 동안 같은 곳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의 특수성을 유지한다. 정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전의 유동 집시의 사회 습관은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기동성은 지금도 중요하며 서유럽의 많은 집시들에게는 자동차가 필수불가결한 상거래 도구가 되었다. 이동을 계속하는 집시들은 말과 바르도(포장마차)가 아닌 자동차가 끄는 트레일러 하우스를 이용한다. 새로운 이동 형태와 이동식 주택은 이들의 삶의 결을 바꾸었다. 특별히 텔레비전의 등장은 모든 집시들에게 있어서 바깥 세계를 더욱 가깝게 해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가제의 가치를 흡수하는 새로운 통로로 기능했다.
▶순례와 펜테코스트파
집시들은 자신들이 일정 기간 살았던 나라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가톨릭 집시, 프로테스탄트와 그리스 정교회의 다양한 종파를 믿는 집시, 무슬림 집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나 진정한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에 이르러 집시의 순례는 정기적인 행사가 되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매년 5월 24일과 25일에 까마르그 지방의 레-생트-마리-드-라-메르에서 개최되는 축제이다.
전후에는 교회에 의해 전도와 자선활동이 행해졌다. 종교부흥운동은 프랑스 각지, 유럽과 남부 아메리카로 퍼져나갔다. 1970년대 초에는 동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운동이 시작되었고,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보급이 가속화 되었다. 영국에서는 최초의 30년 동안 집시 복음교회는 7만 명 정도의 집시를 개종시켜 세례를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운동으로 인해 집시 인구의 3분의 1을 신도로 확보했다. 종교부흥운동의 목적이 집시들의 동화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서의 원리는 개종자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맹 탈피와 교육을 중시하는 태도나 술과 담배, 마약 등의 복용이나 도박, 사기, 거짓말, 도둑질 등을 금지규범 등이 그것이다.
▶오프레 로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집시들은 전국적 또는 지방적 규모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과 압력 단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독일: 1950년대부터 다양한 집시 위원회가 설치.
-프랑스: 1965년 국제 집시 위원회(CIT)탄생
이들 조직의 주요 목표는 집시를 주류사회로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류사회에 의한 명백한 부정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경제적, 지리적 유연성을 유지할 필요성, 이동을 계속할 권리, 정규 교육에서 로마니어와 집시 문화사용 등이 강조되었다.
-1971년 4월 국제 집시 위원회가 주최한 최초의 세계 로마니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
14개국의 대표가 참석했으며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롬’을 지정, 민족기와 슬로건-오프레 로마!(집시여 일어나라!)을 채택했다.
-1978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 로마니 회의에는 인도가 다수의 대표를 보냈는데 집시와 이 아대륙과의 연대가 강조되었다.
-1981년 5월 괴팅겐에서 열린 제3차 회의에서는 나치 치하 집시의 운명의 주요 의제였다.
1989년 이후 일부 집시들은 국내 및 지방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제4차 세계 로마니 회의에서는 배상, 교육, 문화, 홍보, 언어, 집시 백과사전 등 다양한 과제를 추구할 임무를 부과했다. 집시를 위한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 세계 집시의 관점에서 전 세계의 집시관을 재구성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표준적인 문자 언어의 정비 역시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형(語形)의 다양성 조정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표준적 어휘가 존재하지 않으며, 극히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조차 방언들 사이에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감상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은 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C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집시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는 것은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저에겐 ^ ^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보여주는 집시들의 역사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에 대한 어느 것 하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다는 것이 비밀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저는 특별히 저자의 신중한 태도가 인상깊었습니다. 집시들의 역사에 대해서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하지않고 계속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그래서 집시들의 진짜 모습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 어느것 하나 명확한 것은 없지만(확실한 것이 없기에 더 흥미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역사 속 한 줄,혹은 한 부분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과 그리고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집시 형제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이들에 대해서 아주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집시들의 삶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들의 삶을 어려움을 진정 마음으로, 진심으로, 공감하고 내 일처럼 마음 아파하는 그런
...  집시들의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조숙희 12-04-30 20:17
 
사랑하는 나래 자매 수고했어요.
긴글을 알뜰하게 잘 서머리 해주었네.
아마 하나님만이 롬 족에 대해서 잘 아실것아요.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아니 자기 자신들로
자신들을 모르지요.  이유는 만연한 불확실성, 회색빛 진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비오는 혹은 안개 낀 해질 녁 같은 그들의 민족성과 모든 것들을
햇빛 쨍쨍한 날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작은 할 일들이지요...
홧팅!!!!!!!!!!!!!!
현상민 12-05-02 02:36
 
집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집시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축복합니다.
많은 결실이 맺어지길 기도하며..
나래선교사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함을 감사드립니다.
강나래 12-05-02 08:53
 
저 또한 이 귀한 사역의 자리에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 감사함을 매일 매일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